2009년 10월 7일 수요일

나에게 쓰는 편지



원래는 B에게 써준 것인데, 생각해 보니 이건 나에게 쓰는 글인 것이라. 여기에 적어 본다.



그렇게 긴 시간 다니던 학교를 떠나 새로운 출발을 맞이한 나 자신에게 편지를 써 본다. 확실하지만 잡혀지지 않는 목표를 두고 언제나 허우적대던 나에게 편지를 써 본다. 매번 너를 죽이고 나만 쳐다보는 나에게 편지를 써 본다.

학교가 가르쳐준 것은 많다. 알려준 인연도 많다. 하지만 그만큼 학교는 나로부터 시간과 수고를 빼앗아갔다. 언제 돌려주겠다는 기약 없이 말이다. 그 속에서 주어진 일을 하기 위해 수많은 아침을 헤매고, 수많은 새벽을 보내버렸다. 웃기도 많이 웃었지만, 많이 울기도 하였다. 또 한 번의 성장 고통을 겪는 나에게, 학교에서 보낸 기나긴 세월은 나에게 아프지 않은 고통을 안겨다 주었다.

위안이 되는 것은 목표였다. 그러나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무디게 보내온 끝에, 그것마저 신기루가 되었다. 무엇인지 말할 수 있되, 말할 수 없는 그런 상태가 되어버렸다. 어차피 앞날은 모르는 것이지, 라고 위안해도, 위안이 될까? 계속 너를 죽이고 내가 살면 될까, 아니면 나를 죽여야 내가 살 수 있을까?

언젠가 이 편지를 다시 읽는다면, 내가 왜 이런 글을 써야 했는지 그대는 알까?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면, 다른 모든 것을 이해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

2009년 9월 21일 월요일

ハッピ- フライト(해피 플라이트)



중앙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었다. 중앙극장에는 심슨 인형을 뽑는 기계가 1층에 1대, 2층에 1대가 있는데, 이 영화를 기다리면서 인형을 하나 뽑아냈었다! 그리고는 E에게 선물로 주었는데, 이것이 나름대로 의미가 크다 하겠다. 비싼 선물이 아닌, 마음이 집중되어 생겨난 선물이기 때문이다.

허나 그것도 그 때만의 의미였을까? 심슨 인형이 더 이상 인형이 아니게 된 것과, 갑자기 인형으로 다시 자리찾기를 한 것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바라보는대로 보이고, 느끼는대로 느끼니 그러하다. 순간 순간이 부질없어진다는 말이다. 어째서 '열정'이라는 것을 지닐까?

해피플라이트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해피"하다. 순간의 어려움이 있더라도 결국은 "해피"해진다. 얼마나 실생활이 행복하지 않으면 영화에서라도 행복함을 찾을까? 얼마나 남의 체온이 그리우면, 서로 사랑하게 될까? 행복이라는 단어를 늘상 생각해야 할만큼, 우리는 얼마나 불행할까. 이 모든 것을 알고서도, 순간의 마음 움직임에 따라 상대방을 죽여버리는 사랑은 얼마나 더 잔인해져야 직성이 풀릴까.

2009년 9월 14일 월요일

불꽃 문화생활 4종셋트



등산->20세기 거장 사진전->뼈다귀 해장국->까페라떼 (까페 Après-midi).

와우. 충분한 문화생활이다. ㅎㅎ 다행히 우면산 등산을 해가지고,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사진전에 갈 수 있었다. 사진.... 다시금 수동 카메라를 지니고 다녀 볼까나? 자주 봐야겠다. 그리고, 같이 왔으면 더 좋았을 걸.

2009년 9월 6일 일요일

Der Untergang



몰락에서 트라우들 융에가 했던 말이다. 원문을 알게 되어서 적는다.

„Und in dem Moment hab ich eigentlich gespürt, daß das keine Entschuldigung ist, daß man jung ist, sondern daß man auch hätte vielleicht Dinge erfahren können“

"그리고 그 때 전 깨달았어요. 용서가 안되어요. 젊다는 것은. 하지만 젊기때문에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마 있겠죠."

2009년 5월 12일 화요일

박쥐



"제 눈에는 불쌍한 노총각으로만 보여요."

그 말이 맞긴 맞다. 불쌍한 노총각들이 신부들이지요. 그러나 신부들이 앞으로 결혼을 허락받는다든가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랬다가는 가톨릭 교회 근간이 흔들릴 테니까. 게다가 태주에게는 신앙도 없다. 죽으면 다 끝이라는 말도 서슴지 않고 한다. 그러나 결국 마지막에는 상현의 신발을 신었다. 아무 것도 믿지 않던 그녀가 믿은 건 그 신발 뿐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 나오는 모든 캐릭터들이 사실상, 인간 한 명의 개체에서 나온다고 설명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상현도, 태주도, 심지어 행복한복집 가족들 모두가 마음에 다 존재한다는 설명이다. 이러니 인간 자체가 "불쌍한 노총각"일 따름이다. 첫 대사가 "당근이죠."라고 말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어차피 종교가 추구하는 신,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무신론(?)을 강조하는 것도 지나쳐 보인다. 그저 사랑 이야기로 봐주면 안될까.

2009년 5월 4일 월요일

똥파리



왜 제목이 똥파리인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귀찮게 달라붙는 똥파리라서 그런가? 아, 그렇다면 똥파리가 가족이겠군. 뭐, 영화 관련 잡지는 물론 기사도 안보게 된지 꽤 오래라서 다른 사람의 해석은 관심 없다. 아무튼 결론부터 말하자면 무척 쎈 영화이고, 무척 슬프다.

뭐, 욕 많이 나오면 쎈 영화랄 수 있겠고 ㅎㅎ, 슬픈 이유는 이게 비단 용역깡패 얘기가 아닌 거 같아서 그렇다. 가족의 문제야 크건 작건 누구나 갖고 있을 테고, 결국은 자기와 '대화'를 나눌 상대가 없다는 걸 여실히 보여줘서다. 조카 꼬마애가 대화가 가능하다고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애는 일방적인 애정 앞에 노출되었을 뿐이다. 그게 대화인가? 양육이자 보호이지.

도대체 대화, 대화란 게 무엇이기에 사람을 그리 비참하게 만들까?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우엘벡의 말이 정말 맞단 말인가? 그렇다면야 기꺼이 타인과의 대화를 그저 '데이터의 쌍방향 이동'이라 정의내려도 좋다. 기꺼이 허물 없이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일생에 한 둘이나 있을까 모르겠다.

그렇다면 역시 결론은 사랑. 타인을 끌어들이자면 그 방법은 오로지 사랑 뿐이다.

2009년 5월 1일 금요일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Vicky Cristina Barcelona)



제목이 비키, 크리스티나, 마리아-엘레나였다면 별로 가오가 안섰을까 생각하면 흥겹다. 걍 바르셀로나로 처리하여서 마리아-엘레나와 후안 안토니오를 쌍으로 없애버린 센스에 감탄한다. 그러나 한국어 제목도 좋다. 어차피 내 남자가 되었다면, 내 남자의 물건(!?)도 나의 물건이기 때문이다.

다들 이 한국어 제목에 대해 언짢게 생각하던데, 오히려 모든 관계의 축이 되는 "내 남자"를 전면에 내세운 것도 좋지 않을까? 그만큼 제일 현실적인(!) 캐릭터인 비키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페넬로페 크루스의 영화다. "아내"도 나와 주어야 한다.

왠지 모르게 페넬로페 크루스도 세월이 갈수록 제값 하는 배우로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중반 이후, 나오자마자 화면과 모든 주목을 그녀가 빼앗아 가버린다. 비키와 크리스티나가 바르셀로나에 먹혀버린 것이다. 우디 할배가 그것을 노리고 시나리오를 썼는지는 모르겠다. 결국 이 영화가 얘기하고 있는 건, 남편과 아내의 쌩살 사랑 이야기. 비키와 크리스티나는 우리들, 관객이다. 당연히, 내 남자의 아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