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 28일 금요일

Once

어쩌면 이런 영화를, 아니, 이런 노래를 만들어냈을까? 아니, 굳이 몸 상태가 이상한 지금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감동받으며(!) 볼 영화다. 무엇보다 내게는 기억이 있다. 현재를 살아가는 데에 장애물이 될, 고통밖에 못 될 기억들이다. 보는 내내 괴로워할 수 밖에. 아... 지금의 나로서는 술도 삼가해야 할진저.


"Miluju tebe!"

상대방이 알아듣지 못하는 체코어로 말한다. 저 정도야 검색하면 금방 나온다. 그런데 계속 말하지만, 사랑을 마음으로 하나? 어차피 태권브이처럼 합체가 되지 못할 몸. 말도 합체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남자의 말, 여자의 말 모두 외국어가 아닐련지. 똑같은 사건도 서로 다르게 기억하기 일쑤다. 똑같은 장면도 두 사람의 뇌는 나름대로 기억과 해석을 반복한다.

남자는 못알아듣고 가르쳐달라 조른다. 여자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여자는 오토바이를 가르쳐달라 조른다. 남자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C'est toi qui j'aime. Ce n'est que toi qui j'aime. 아... 이거 참.

못알아듣고, 알아듣고가 문제는 아닐 것이다. 노래 연습을 더 할 걸 그랬다. 기타를 그 앞에서 쳐볼 걸 그랬다. 그래도 기타 코드는 아직 기억하고 있는데. 하나의 바람, 희망, 꿈이었을까. 덧없다. 부질 없다. iPod까지 간헐적으로 목소리를 들려준다...

2007년 9월 27일 목요일

26일의 일기

기록을 해 놓아야겟다.

아침에 꾼 꿈이 문제엿다. 꿈 속에서 아이(말 그대로 아이)의 소식을 들엇다... 꿈이엇다.

Once를 보앗다. 눈물 범벅이 되면서 보았다.

2007년 9월 25일 화요일

벌써 1년

회사로 향하는 셔틀버스는 두 대가 잇다. 하나는 고려대역에서 출발하고, 다른 하나는 청량리역에서 출발한다. 지난 1년동안 내가 출근하는 루트는 다음과 같은 변화를 거쳣다.

  1. 2호선-6호선-고려대역
  2. 2호선-왕십리역-시내버스-고려대역
  3. 버스-압구정 성수대교-시내버스-고려대역
  4. 2호선-왕십리역-구리선-청량리역

대략 첫 번째 방법을 제일 많이 사용하다가, 올해 봄 쯤 들어서 2번부터 4번을 다 시험해 보았다. 결국은 2번과 4번을 유용하게 되었다. 취약점은 다음과 같다.

  • 2번의 경우, 버스가 안 오면 대책 없다. 30분 차 타면 다행이고, 45분 차의 경우 놓친 적이 꽤 있다.
  • 4번의 경우, 셔틀버스가 45분에 떠나므로, 평소에 어중간하게 빨리 오는 나로서는 시간을 죽여야 한다.



간단하다. 시간을 죽이는 편이 더 낫다. 그래서 4번도 즐겨 사용하게 되었다. 그랬더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정겨운 청량리 풍경이다. 사진은 아침에 셔틀 버스 기다리면서 찍은 사진이다. 이런 골목길을 즐겨 돌아다녔을 때는 국민학교 때 뿐이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다. 국민학교 때는 미아리 길을 지나다녔으니 정말 다를 것이 없겠다. 그래도 아침에, 다 큰 성인이 되어서 보니까 또 산뜻하다. 사실 청량리 먹자골목 쪽에 이어진 곳인데, 이런 곳에서의 소주 한 잔이라면 정말 참 멋스럽다.

음. 뭐, 그렇다는 이야기. ㅇ_ㅇ~

2007년 9월 22일 토요일

벌써 1년

내 사원번호는 20060916이다. 9월 16일부로 들어왔다는 얘기다. (실제 출근은 9월 11일부터였다.) oho~에 보면 1년 전 글이 FTA 관련 회의 참가였다. 들어간지 얼마 안되어서 열린 회의였고, 난 땡땡이를 쳤다. ㅇ_ㅇ!

장소가 코엑스였는지라 메가박스 쪽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었었지. 저 넥타이는 2001년 11월 9일날 비행기를 타고 파리로 가다가, 기장이 나에게 준 생일선물이다. 어쩌다 저걸 맸는지 모르겠네. 옛날 사진 보다가 발견한 것인데...


이 때 내 인생은 뭐, 별다른 일도 없었고 평온했었다. 블로긴도 열심히 하던 시절이엇지. 금방 들어가자마자여서 쫌 정신없는 시절이긴 했다. 다가올 2007년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이 없었고, 이 때 할 일이 없었던 나는 회사에서 소설, "망량의 상자"를 읽었었다. 아마 저 회의장에도 들고갔었던 기억이 난다.

망량의 상자... 참 축축한 소설.

그리고 2007년. 2007년은 도둑처럼 다가왔다가, 날 때려눕힌 채 지나가고 있다.

2007년 9월 20일 목요일

Loulou

이자벨 위페르를 좋아하려면, 아무래도 "레이스짜는 여인"부터 봐야 할 터인데, 그 영화는 아직까지 못 보고 있다. 기회가 안 되서일 것이다. 금번 하이퍼텍나다에서 하는 이자벨 위페르 전에서도 놓치고 말았다. 그래도 룰루라도 보는 것이 어딘가. 게다가 동정 없는 세상의 분위기를 나타내는 영화가 흔하지는 않다. 희망이 있어도 절망뿐인, 절망이 있어도 슬프진 않은 애매한 시기가 80년대 프랑스였을 것이다.


...라고 말하면 옆길로 빠지기 쉽다. ㅎㅎ 서방세계 최초로 공산당이 여당이었을 때가 80년대 초의 프랑스 풍경이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때문에 바로 절망으로 바뀌기는 하는데, 그 영향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룰루가 넬리에게 어째서 '남자'가 되었는지 깨닫지 못하면...

글쎄. 이 곳을 몇 명이나 볼련지는 모르겠으나, 날 좋아한다면 이 영화도 썩 재미나게 볼 수 있을 듯 싶다. 앙드레가 어째서 넬리를 놓치는지, 어째서 앙드레가 넬리를 이해하는 듯 하면서도 못하는지, 어째서 넬리가 룰루에게 남는지. 안다. 잘 안다. 절실히 안다. 하지만 역시나 분하다. 농담처럼 넬리는 룰루가 매일 해준다고(!) 하지만, 그것만이 아님을 안다. 알기 때문에 더 이해해도, 역시 이해하기 싫다.

룰루야 만사 태평. 그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한국어로 어떻게 하면 더 번역이 잘될지 모르겠다. 영어로는 I don't care도 있겠지만, I never give damn to you.도 의미가 비슷하다.

Je m'en fous, toute!

그런데 어쩌나. 말로야 그렇게 하기 쉽지. 뭐든지 사랑이 아쉬운 나로서는 뭐든 미심쩍다. 저주라면, 저주다.

2007년 9월 18일 화요일

GIA

사실 이 영화에 나오는 졸리(!)와 실제 모델, 지아 카란지가 서로 정확히 닮지는 않았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난 직후라면, 닮았다는 생각밖에 안든다. 물론 어차피 죽은 사람을 살려 놓은 영화이니, 유사성 여부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째서 지아에게 매력을 느끼는지, 어째서 그녀의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보게 되었는지이다.

난 정확히 무엇을 보았을까? 지아?


그러고보니 박지아 씨 이름이 본명인가 하는 생각도 드는데, ㅎㅎ 본명이 아니면 또 어떤가. 그러면 더 좋다. 어차피 먹고 살기 위해 얼굴을 팔고 이름을 팔았으니, 제아무리 약에 취했다고 해도 나름대로 행복했을 것이다. 분명. 문제는 남겨진 자들의 몫이다.

남겨진 자들의 몫. 무척 까다롭다. 개인적인 호불호로 몰아가면 뭐든 간단해지지만, 그 '개인'이 당사자가 될 수 밖에 없다면, 더 이상 간단해질 수 없다. 물론 호쾌하게, 팩토리걸에 나온 '퀸'처럼 상대하면 그것대로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남겨진 자의 죄는 무엇일까? 평가하려 해서 죄일까, 아니면 돌봐주려 해서 죄일까?

뭘 어떻게 해도 의미가 없는 삶이니, 폭주나 극단적인 결정이 난무해도, 돌봐준다는 것. 받아준다는 것. 사랑하는 것. 축복일까, 저주일까?

남겨진 자들은 그 만큼 고통을 더 느껴야 할 테니, 제멋대로 살다간 매력 있는 신인류를 떠받들어 주어야 제맛이다. 남겨진 자. 괴롭다. 피동형 동사. 괴롭다. 괴롭다만은 능동태네.

2007년 9월 16일 일요일

열 한 번째 게시

아.... 차마 내 입으로 말할 수 없었다. 아니 말하고 싶지가 않았다. 지금 나와 얼굴을 맞대고 차를 마시고 있는 S는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이 하버드스타일이라고 한다. 내가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은 아멜리 노통브의 '공격'이었다. 커피빈에서 마키아토와 물을 갖다 놓고, 한 두 시간 앉아 있더니 다 읽을 수 있었다.

당연히 말하고 싶지가 않지. 최근엔 아멜리 노통브의 '공격'을 읽었고요. 그 전에는 알랭 드 보통의 "키스 전에 하는 말들"을 읽었어요. 아. 레드 제플린이 다시 그룹을 결성해서 노래를 부른다네요. 예. 전 기관이전하면 그냥 따라가고 싶어요.

그린란드에 가고 싶어요. 미국으로 간다면 단연 알래스카. 왜요? 인간들이 싫어서요.

그린란드 가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다만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시베리아는 호랑이나 곰한테 쫓길 수 있으니 좀 곤란스럽다.

음. 왜이리 공격적으로 변하였을까? 모든 것이 다 지겹기 때문이리라. 지겹고, 쓸쓸하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날씨는 점차 스산해져간다.

아름다움. 아름다움만을 느끼고 싶다. 이래저래 난 친구가 없다.

2007년 9월 14일 금요일

기담



다행히도 마지막 상영을 볼 수 있었다. 장소는 씨네큐브 맞은 편에 있는 미로스페이스였는데, 우연찮게 감독과 미술감독의 간담회(!)도 있었다. 답변들을 G7카메라로 찍었었다. 맨 마지막 답변만은 디스크 용량이 모잘라서 못찍었는데, 미술감독의 이름이 나와 같더군. 신기하네. ㅇ_ㅇ

그건 그렇고, 존나게 사랑하면 저리 되는 것일까.라는 생각부터 난다. 맨 마지막 대사때문이 아니다. 에피소드 세 가지 모두 다 중심축이 지독한 사랑이라서이다. 얼마나 존나게 사랑했으면 영혼까지 결혼을 시키며, 얼마나 존나게 사랑했으면 의사 아저씨까지 데려가려 했을까? 얼마나 존나게 사랑했으면 그림자도 안보일까?

공포영화가 아니었던 거다. 귀신이 나와도 놀라지 않았다. 갑작스레 시체함으로 끌고 들어가도 놀라지 않았다. 사랑스럽기 그지 없는 지아씨가 알듯 모를듯 소리를 내도 놀라지 않았다. 나비비녀로 사람을 찔러대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눈물이 나더라. 무엇이 그들을 존나게 사랑하게 했는지 따지는 건 의미가 없다. 존나게 하건, 시시하게 하건, 사랑은 참 쓸쓸하다.

2007년 9월 10일 월요일

Broken Flowers

Well, the past is gone, I know that. The future isn't here yet, whatever it's going to be. So, all there is, is this. The present. That's it.

존스턴이 마지막에 (아들일지도 모를) 소년에게 해 준 대사이다. 소년은 그에게 철학 한 마디를 요구했었다. 그래. 과거는 가버렸고, 미래는 아직 안왔으니 어찌 될지 모른다. 남은 것은 현재 뿐이다. 네 명의 여자는 가버렸고, 앞으로 누굴 만날지는 모르나, 현재는 아무 것도 없다인가?


쥘리 델피는 이 영화에서 이름이 "셰리"다. 스펠링을 비틀어 보면 발음이 같은 불어 단어, "Chéri"는 여자가 남자 애인을 지칭할 때, 즉, "자기"라는 의미다. 델피가 분명 저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 델피도 결국 존스턴의 한 모습이었다는 의미도 되겠다. 그녀는 그를 떠났다. 존스턴의 한 모습은 존스턴을 떠났다.

하지만 마지막에 보면, 그 존스턴은 다시 돌아오리라는 기대를 낳는다. 역시 현재밖에 없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김기덕 시간에서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온다. "제가 행복해 보이나요?"

처음부터 끝까지 무표정인 이 존스턴이 돈 후안이었다니, 믿기 힘들다는 생각부터 나지만, 그의 무표정은 애써 감춘 그의 과거이자, 애쓰지 않아도 드러나는 그의 쓸쓸함일 게다. 절친한 친구 윈스턴처럼 다섯 명(!)의 아이와 단란하게 사는 편이 옳았을까? 츄리닝을 입고 혼자서 음악과 영화에 빠져 사는 그의 사생활은, 그의 감춰진 슬픔을 드러낸다.

바라는 것이 없다는 점. 바뀔 것, 바뀐 것이 없다는 점. 아들이 있건 없건, 위안이 안된다는 점. 지독하다. 그걸 모르는 채 사는 편이 나을까. 아무런 삶의 의미가 없는 현재, 바로 그런 의미가 없기에 현재일 게다.

2007년 9월 8일 토요일

열 번째 게시



Broken Flowers를 보러 아트시네마에 갔었다. 사실 세미나가 퇴근 시간을 넘기길래 일정이 엉망(?)이 되어서 간 것이었고, 실제로 브로큰 플라워를 하는지는 모르는 상태였다. 원래 일정은 CQN에 가서 이마무라 쇼헤이를 보는 것이었는데... 보지 않기로 결정내렸다. 아니 꼭 요새들어 이러는 건 아닌데, 일본 건 왠지 모르게 수준이 낮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왠지 모르게. 중요하다. 역시 서양 것들이 취향에 맞는다.라고 한다면 그건 너무 부드러운 표현이 될 터.

아무튼 그 담배 피기 명당(!) 중 하나인 옥상에서 밑을 쳐다 보았다. 저녁 8시쯤 되었으니 이미 어둑어둑해진 상태였고, 뭐가 그리들 좋은지 사람들은 모두 웃고 있었다. 그 때. 그 때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다행히도 옆에 아무도 없었고, 나의 G마켓 안경은 테가 상당히 두터워서 나의 눈물을 잘 가려주고 있었다.

앞을 쳐다보며 꺼이꺼이 울었는데, 이게 이게... 물론 사랑때문인 것이 맞다. 사랑을 마음으로 하나? 정말 그러한가? 사랑은 마음을 나누는가? 정말 그러한가? 싱크.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 아닐까. 처음의 느낌을 무너뜨린 것은 몰랐던 사실일까, 알게 된 사실일까.

무엇보다... 친밀해진다는 것. 그것은 사랑을 희생시키는 담보일까. 친밀함은 가장 상처받기 쉬운 모습이렷다. 그래서?

좋은 지적이다. 그래서? 역시나 또 다시 아이가 되어버린다. 도대체가 낙원상가는 날 왜이리 아프게 만드느냔 말이다.

2007년 9월 4일 화요일

오프로드

한국은 현재 모든 도로가 '포장'되어 있다. 어느 촌구석을 가더라도 포장되어 있다. 다만 차선은 2차선뿐이다. 가고, 오고. 그 뿐이다. 사막으로 가는 길도 그러했다. 가고, 오고. 그 뿐이다. 이따금씩 느리게 가는 차를 빠르게 앞질러 가는 것은 그 만큼의 담보를 요구하였다.

내 성격에, 느리게 가는 앞차는 추월하고본다. 도시에서는 느긋한데, 사막에서는 도저히 그게 안 되었다. 역시 사막이 날 삼켜버리잖았을까. 게다가 꼴에 위급한 상황에서도 태연해 하였다. 아니, 초연해 하였다. 초연. 나 혼자 놀았다는 의미도 된다. 그녀는 그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별자리가 같으니 그걸 모를리 없다.

지독한 외로움을 강제로 떠안긴 셈이다. 나도 모르지 않았어. 하지만 가고. 오고. 그뿐인 길이다. 느슨했던 여행은 어느새 돌아보지 않는 길로의 여행이 되어버렸었다. 그리고 난 역시 초연해 하였다. 외로움 따따블. 난 왜 말을 못할까? 나라서일까, 남자라서일까? 질문이 곧 변명일까?



오프로드의 주인공들은 울고 웃다가 막바지로 치닫는다. 평범한 삶. 평범한 사랑이 얼마나 어려운지, 얼마나 짚어내기 막막한지 이제는 안다. 아니, 이제서야 알았기에 난 죄를 지었다. 계속 죄를 짓고 있다. 이들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던 나는, 일단 울고 보는 아이가 되어버렸다.

울었다. 아렸다.


2007년 9월 3일 월요일

coffee and cigarettes

일요일 오후, 낮잠이나 잘까 하던 차에 EBS를 틀어보니 이게 웬 걸. "커피와 담배"를 하고 있었다. 물론 종로 스폰지 극장에서 작년 여름인가에 상영했던 것을 봤었다. 하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이 영화는 다시 보아도 참 재밌다. 아마 "담배는 해로워" 편부터였을 것이다.



나 자신이 술과 커피를 즐겨하는데 담배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금연을 혐오한다. 좀 이상하달 수도 있겠지만, 담배냄새가 고약하다거나, 싫다고 느낀 적은 별로 많지 않다. 맞담배는 아니더라도 고립된 장소에서 담배피는 그녀를 상대해줄 수 있는 자가 나이다.

맞아맞아. 그 때에도 스폰지 밑 까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말이다. (책 읽는 것 역시 육체 건강에, 정신 건강에 그다지 좋지는 않다.) 늘상 하는 일이다. 늘상 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다. 기다릴 때에는, 조바심을 가질 때에는, 그리고 설레일 때에는 언제나 그래왔다.

그런 생활이 나의 더러운 구석을 얼마나 감쳐줬는지는 헤아릴 만하지만, 그런 것. 의미가 있나? 아는 채, 모르는 채. 오늘도 커피를 끓이고 있다.

2007년 9월 2일 일요일

Dopo Mezzanotte

제목의 뜻은 말그대로 "애프터 미드나잇"이다. 그냥 "자정 후"라고 지었으면 더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드는데, 사실 뭐 상관 없는 일이다. 영어로 하는 편의 어감이 더 좋았나보지. ㅇ_ㅇ

그런데 포스터에도 나오는 아래 사진에 주의를 끄는 문장이 쓰여 있다. 앙뚜안 뤼미에르가 했다는 말로서, 영화 안에 변사(이 영화에는 변사가 있다!)의 대사로도 나온다.

Il cinema è un'invenzione senza futuro.
영화는 미래가 없는 발명이다.



과연 그렇다. 쥴앤짐을 어설프게(?) 따라한 이 영화 속의 커플은 과연 미래를 염두에나 두고 있을까? 마르티노(얄궂게도 '아침'의 의미를 갖는다)가 과연 앞날을 생각하고 영화를 찍었을까?

따라서, 미래가 있는, 앞날이 있는 발명이란 존재할까?

뤼미에르가 그 점까지 염두에 두고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저 말이 명언이기는 하다. 물론 '인터넷은 뜨지 못할 것이다"라는 빌 게이츠의 말과는 다른 의미로서 말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겠다. 아니, 사랑도 마찬가지이겠다. 미래를, 앞날을 생각하는 순간 사랑에서 멀어지고, 사람에서 멀어진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내일이 없으니, 우리이다. 살짝 바꾸니 이렇게 뜻이 흘륭해진다.

쓰다보니 영화와는 멀어진 글이 되어버렷다! ㅇ_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