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까뜨린. 애틋한 이름 중 하나다. ㅎㅎ 좋아했던 여자애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그 애의 암호를 까뜨린으로 했던 기억이 나서다. 상당히 옛날 이야기이다. 물론 워낙에 흔한 이름이기에 여기 저기에서 그 이름을 볼 기회가 많았다. (그 유명한 카테리나 디 메디치... ㅇ_ㅇ) 하지만 당연히, 이 영화 안의 까뜨린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그리고 남자 2+여자 1라는 점에서도 생각나는 관계(!)가 있다. 내 생애에 3각 관계는 두 번 정도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글쎄. 더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두 번의 사례 모두 결과만 따지자면 나의 승리(?) 비슷하게 돌아갔었다. 물론 지금 와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손 잡았다고 의미가 생기랴? ㅎㅎㅎ 아니 뭐, 의미를 만들라면야 얼마든지 생각해 볼 수는 있겠다.
다시 돌아가서, 까뜨린의 존재가 사못 크다. 독일 남자 쥴과 프랑스 남자 짐 사이에서 까뜨린은 대단히 영롱하게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쥴과 짐은 까뜨린을 하나의 사랑으로서, 한 명의 성모로서, 하나의 나라로서 섬겼다. 쥴의 대사에서도 나오는데, 특별히 지적이라거나 특별히 뭔가 특별하지는 않지만, 그 만큼 순수하기에, 그 만큼 줏대가 있기에 100% 여자라는 평이 있다. 까뜨린은 100% 여자였다.
그거 하나면 말 다하지 않았나? 트뤼포가 사랑했던 FANNY ARDANT도 이런 여자였을까? 즉, 하나의 성모로서, 여자로서, 엄마로서 그녀는 무엇을 필요로 하였을까? 떠받쳐 주어야 할 남자가 필요했을까? 그렇게만 생각하면 참 측은하다. 하지만 아이에게 집착하는 그녀의 모습은 다시 한 번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녀 자신은 그녀에게 무엇이었을까? 찌질한 까뜨린에 불과했을까?
2007년 12월 30일 일요일
Jules et Jim
2007년 12월 27일 목요일
그 날
-이성복-
그날 아버지는 일곱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다리는 통통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의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게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속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 치는 노인과 변통(便桶)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2007년 12월 26일 수요일
23번째 게시
2007년 12월 21일 금요일
Dans Paris

"Est-ce qu'il est possible, vraiment, qu'une histoire d'amour nous fasse sauter d'un pont?"
영화 첫 머리에 나오는 대사다. 처음에는 형이, 두 번째는 동생이 (아무래도 시험삼아?) 빠지기 때문에 저런 대사가 나왔다. 여기서도 크리스트교의 영향(?)을 거론할 수 있겠는데, 물에 빠지는 것은 세례의 의미가 있다. 인간이 나은 아이 중 제일 위대하다고 성경에 쓰여 있는 세례자 요한이 한 일이 그런 것이다. 한 번 물에 빠졌다가 나오는 것. 속죄다. 부활이랄 수도 있겠다. 정화와 치유의 능력을 물이 지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야 그런 능력을 받아 보고 싶은 것이 바로 찢겨진 심장일 것이다. 뽈이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다리에서라도 뛰어 내려야 찢겨진, 혹은 분노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만 말하자면, 가능하다. 다리에서 뛰어내릴 수 있다. 고작 사랑때문에.
하지만. 그래도 한 번 깨지면 고칠 수 없다. 그 때문에 참 지랄맞고 찌질해지는 거이 진짜 사랑이다. 사랑하면 좋을줄 알지? 행복하다 느낄 때는 정말 흔치 않더라. 정말...
2007년 12월 18일 화요일
Paranoid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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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저 커플은 서로간의 목표가 달랐다. 그리고 그것을 서로 모르고 있었다. 사내 애는 갑자기 그것을 깨닫고, 계집 애는 갑자기 그것에 와닿는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을 왜 몰랐을까? 자신이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사랑이 누구의 것도 아니기에 어디로 튀는지 알 수 없노라고 매번 쓰긴 하는데, 사실 세상에 나서 자기 것이라는 개념이 있나? 신체는 부모에게 받은 것이오, 먹을 것은 자연에게 빌린 것이다. 사회는 국가에게 빌린 것이고. 도대체가 자기 것이 없건만, 자기 것이 있는 양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다.
...라고 하면 좀 거창하긴 하다. 저 소년이 결국 한 사건을 통해 성장을 한다 하더라도. 저 소녀가 섹스를 통해 성장한다 하더라도. 저 둘은 앞으로도 비슷한 인생을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쉽게 말해서, 성장하지 않는다. 어차피 커봤자, 무책임한 이혼남녀가 될 뿐이다. 사랑을 해봤자, 편지를 써봤자 수취인불명이다.
수취인불명. 대답 없는, 정답 없는, 기약 없는 사랑, 그리고 인생. 신은 정말로 잔혹하다.
2007년 12월 16일 일요일
Paranoid Park

위 계집애는 사내애에게 권하였다. 편지를 쓰라고. 일단 쓰라고 말이다. 그 편지를 보내고 싶은 사람에게 보내건, 그냥 혼자 간직하건, 아니면 불애 태워버리건 그건 마음대로 할 일이라면서 편지를 쓰라고 하였다. 일종의 마음 정리, 혹은 마음 추스리기일 것이다. 물론 중요한 점이 하나 있다. 편지로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아니, 원래부터 해결된다는 것이 있기는 할까? 제아무리 꾀를 써도, 발버둥을 쳐도, 자학을 해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누구나 날 떠나고, 누구나 날 안다고 이죽거렸다. 나는 헤펐고, 그녀는 엄했다. 나한테만.
그래도 편지를 써야 할까? 자기 위안일 뿐인 글이나 써대야 할까? 나는 어째서 침묵을 지킬까? 별 수 없는 사내라서일까, 아니면 일종의 허영일까? 남는 건 침묵. 그리고 침잠.
2007년 12월 11일 화요일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날 가지니까 좋아?"
민재가 자기를 짝사랑하는 민수에게 던진 말이다. 민수가 바라는 것이 민재의 몸 뿐이었다면 당연히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뿐만이 아니니 좋은 건 좋은 거고, 고통스러워할 수 밖에 없을 노릇이다. 도대체 이 여자는 어째서 자기가 가질 수 없는 남자를 좋아하는 것일까? 소설가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이 사내는 어째서 자기가 가질 수 없는 여자를 좋아할까?
자기가 가질 수 있는 상대를 갖고 노는 것은 여자 뿐이다. 워낙에 사랑은 없을 때 더욱 크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니까, 가질 수 없는 상대에 더 큰 애착, 혹은 집착을 보이는 것이리라. 즉, "날 가지니까 좋아?"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경멸이요, 비웃음이다. 하지만 절망적이기도 하다. 나의 마음값이 바로 나왔으니까.
내 마음값이 싸구려라는 것. 비극일수도 있고 희극일수도 있다. 싸구려니까 싸구려답게 나아가게 되면 그것대로 위안을 받을 수 있을까? 위안. 위안이 중요한가? 좌충우돌하는 행동 끝에, 애정 끝에 남는 것은 아무 것도.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었다. 길 잃은 아이처럼, 아무 말도 할줄 모르는 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2007년 12월 6일 목요일
강원도의 힘
범인은 범행을 저지른 곳에 다시 나타난다.라는 말이 있다. 어디에서 이 말이 나왔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저 문장의 범인은 비단 사회에서 일컫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만이 아니다. 모두가 그러하다. 모두가 철새다. 귀소본능, 귀향본능. 이런 건 모두에게 다 있다. 왜 그럴까? 인간이 제아무리 진화해봤자 철새수준이라서일까? 
아니 꼭 '강원도'에 가야지만 그러하지도 않을 것이다. 좋게 말하면 추억이오, 나쁘게 말하면 부끄러움일지니, 그것은 언제나 유령이 되어 주위를 배회한다. 게다가 그런 유령은 도처에 출몰한다. 애초에 물리적인 형태가 없으니 때와 장소를 가릴 이유도 없잖나 싶다. 여자는 사랑을 했을까? 남자는. 여자를 사랑할까?
영화가 곳곳에 의도적으로 '한 명'을 쏙 빼놓는다. 처음에 여자는 친구들을 못찾아 혼자 우두커니 서 있었고, 가는 길에도 금붕어 한 마리만이 떨어져 있었다. 경찰과 같이 갔던 모텔도 결국 경찰을 '쏙 빼놓는다.' 남자의 친구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혼자 교수가 되었다가, 나중에도 혼자 먼저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떠버린다. 기르던 두 마리의 금붕어도 한 마리만 남는다. 도대체 여자는 무엇이었지? 남자는?
뭐, 강원도의 힘을 애둘러 사랑의 힘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애초에 실체도 없고 소유도 없으니 '강원도'와 같은 모든 명사가 들어갈 수 있는 제목이다. 슬퍼진다. 평생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할 유령. 유령은 날 애잔하게 여길까?
2007년 12월 3일 월요일
오! 수정


기억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아니 뭐, 먹고 사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니만큼 기억일랑 누가 어떻게 해도 전혀 상관 없는 문제가 될 수 있겠다. 그래도... 세 끼를 먹고 사는 인간으로서 내게는 살 떨리는 문제이다. 화끈거리는 문제이다. 대단히 부끄러운 문제이기도 하다. 기억이 갈린다는 것. 그것이 두 사람 사이를 완전히 뒤흔들기 때문이다. 나도 실제로 그런 경험을 가진 적이 있다. 정말이지... 무서운 일이었다.
기억이 같았다면 해결되었을까? 라고 한다면 그것도 애매하긴 하다. 여느 문제가 그러하듯, 이 문제 역시 정답은 없다. 역시 몸이 정직하다!라고 친다면, 바로 그것이 정답이 될 만하다.
대체 나는 무엇을 기억하는 것일까?
2007년 12월 2일 일요일
플로피 드라이브

출장을 가는데 노트북을 받았다. 보안 시스템과의 관련때문인지, 외장 플로피 드라이브가 들어있다. 바로 위 사진에 나온 것과 똑같은 드라이브이다. 내가 플로피를 안쓰게 된 것이 거의 노트북 처음 살 때부터였으니까. 언제냐. 99년도부터이겠다.
그런데 정작 눈길을 끌었던 건 다른 데에 있었다. 옛날에 쓰던 플로피 디스크들이 집에 잔뜩 있다는 사실. 눈에 띄는 것만 집어 넣어 보았다. 무엇이 들어 있을까? 당연하겠지만 안 열리는 파일이 대다수이다. 숙제 파일은 다 못열었다.
하지만 그림 파일들만은 열린다. 대단한 건 아니다. 좋아하던 만화 여신님 만화 파일이다. 내가 만든 것도 얼핏 보인다. Claris Works로 만들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야 그 당시에도 맥 유저. 지금도 맥 유저. 이 얼마나 찌질한 팬덤인가. ㅎㅎ 그 때의 마음은 지금도 여전할까?
처음부터 일기적는 버릇을 들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log를 본다는 것. 그것만의 의미도 있을 텐데. 뭣보다도 나 자신의 허술한 맹점에 대해 고찰할 계기가 되었을 텐데.
마음이 조금은 '덜' 아팠을 텐데. 하지만 기록을 남겨 놓았어도 절대로 다시는 못 볼, 못 들을 것이 있긴 하다. 할배쯤 되면 다시 볼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