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영화를 제1세계가 누리던 것을 제3세계가 되어보니 쌤통이다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좀 오바가 아닐까 싶다. 절실해 보이는 깨끗한 물이 제3세계에 그다지 풍족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긴 하다. 하지만 거기서 끝. 무조건 생존(!)이 아니면 살 수가 없는 그런 세상은 선진국이건 후진국이건 매한가지이니까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히려 처음 장면, 아버지가 갑자기 죽어버렸을 때일 것이다. 거 봐라. 내가, 남자는 언제나 죽어버린다고 하잖았던가. 가장이 죽었다는 것. 법질서가 무너졌다는 것. 유통이 무너졌다는 것. 더 무서운 점은, 삶의 고통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오로지 희망만 남아 있는 삶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이다. 물물 교환이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살 수 있다. 몸뚱아리가 자산이니까 말이다. 외국인 혐오증도 삶의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것 아니겠나.
뭔가의 재앙은 그 모든 것을 앗아갔다. 도시 생활에서 느낄 수 있는, 사랑에서 느낄 수 있는 고통을 빼앗아간 것이다. 뭐, 문명 자체를 가져가버렸다고 해도 좋다. 그러니 남는 것은 오로지 기차를 타고야말겠다는 희망밖에 없다. 기차를 타고 간다고 해서 뭣이 있을지 알 수 없으면서 말이다. 참 무섭지 않나. 이런 극본을 써 내고, 또 가차 없이 영화로 만들고야마는 하네케가.
존경한다는 것. 참 어렵다. 압도적인 공포감을 안겨다 주어야 존경할 수 있으니까.
2008년 5월 8일 목요일
Le Temps du lo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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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이 영화 화면 정말 아름답지 않아. '일곱번째 대륙'의 통렬한 일상파괴장면처럼 뜬금없고 강한 공포에도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게 좀 나쁘고 좋아해..정말 김기덕 같다.
고렇제? 하네케는 모두들 기분 나빠하면서 좋아하더군.
김감독님도 마찬가지. ㅇ_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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