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 30일 월요일

젊은 날의 초상



일단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대학 때의 여자, 첫사랑이었던 여자, 구원자로서의 여자다. 그리고 셋 다 주인공을 떠난다. 아니, 주인공이 떠났다고 봐도 좋겠다. 그러면 남는 것이 무엇이리? 글 좀 쓰게 될 재주라도 남게 될까?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을 일컬음인가? 누구나 키보드를 치면 글을 쓸 수 있다. 누구나 펜만 들면 뭐든 쓰거나 그려낼 수 있다. 그런데 누구는 저런 개고생을 하며 쓰고, 누구는 편안히 계산기를 두들기며 쓴다.

S에게 난 위험한 글을 읽기는 해도, 절대 쓰지는 못하리라 말 했었다. 내가 재주가 없어서? 아니다. 누가 쓰건 쓰는 건 쓰는 거다. 다만 내게 작용하는, 끊임 없이 작용하는 평형추가 글을 방해한다. 자신을 찔러대는 것도 한계는 있을 테고, 그녀를 찔러대는 것도 마찬가지의 한계는 있을 것이다. 그 한계를 넘어설 만한 깜냥이 없지 않을까.라고 뭉뜽그려 생각하고만다.

그렇다면 어째서 글을 쓰면 위험해질까.를 생각하게 된다. 아니 다르게 말해보자면, 어째서 사랑을 하게 되면 위험해질까.를 논해도 좋을 게다. 그야 말쑥한 문명인을 그야말로 야만인으로 바꿔버리는 게 사랑이니까. 그야말로 맞춤법을 아는 괴물을 만들어버리는 것이 글이니까 그러하다.

내가 참 처량하다. 연민을 느낀다.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는 대화할 수 없다. 그냥. 그냥 보낼 수는 없어. 내가 갈께. 바로 내가 했던 말.

2008년 6월 25일 수요일

Auf der anderen Seite



인터뷰나 리뷰 기사를 찾아보면 하나 같이 감독이 원래 3부작을 계획했으며, 사랑(Liebe)과 죽음(Tod), 그리고 악마(Teufel) 3부작 중 두 번째인 "죽음"을 그린 영화가 이 "천국의 가장자리"라고 한다. "악마"를 그린 영화는 아직 안 나왔다고 한다. 아무튼 이 영화가 유독 뒷모습을 자주 내비치는 이유도 그런 데에 있을 것이다. 파뜨리스 르콩트의 영화가 늘상 위에서 촬영한 기법을 쓰는 것을 방불케 하는데, 이 영화는 아예 소제목까지 노골적으로 "죽음"이다.

Yeters Tod
Lottes Tod
Auf der anderen Seite

세 번째 소제목은 "죽음"이 아니지만, 죽음을 추모하는 광경이 길게 길게 나온다. 위에 올려 놓은 사진도 세 번째 에피소드에 나온다. 예테르의 죽음을 나름 추모하는 알리의 뒷모습이다. 그리고 워낙에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죽어버리는(이 영화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것 때문에 더 인간적이다. 사실 대단한 사건이나 사고로 죽는 것 자체가 흔치 않을 게다. 모두가 다, 급작스럽게, 허무하게, 예기치 못한 일로 죽어버린다. 남는 이들은 그저 조용히 변치 않는 자연이나 바라보는 편이 낫다.

그만큼 항상 우리 옆을 죽음이 떠돌아다녀서가 아닐까나. 사실 사랑과 죽음이 항상 곁에 붙어지낸다던 나의 옛 로그(!)가 생각나는 밤이다. 거울의 앞뒷면으로 본다면, 사랑이 아니라 삶과 죽음이 항상 붙어 다니잖을까 싶다.

아마 노아의 방주에도 같이 탔겠지. 그래서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 아무런 희망도 감정도 사라진 지금, 그저 차갑게 경계선을 계속 살 뿐이다.

2008년 6월 22일 일요일

I'M NOT THERE



극중에서 아르튀르 랭보가 했던 말은 다음과 같다. 사라지기 위한 일곱 가지 규칙이다.

  1. 비옷을 입은 경찰관을 신뢰하지 말 것.
  2. 사랑과 열광을 주의할 것. 둘 다 일시적이고 빠르게 사라짐.
  3. 세상이 걱정스러운지 물어보면 묻는 이의 눈을 깊게 쳐다볼 것. 다신 묻지 않을 것임.
  4. 진짜 이름을 절대로 말하지 말 것.
  5. 자기 자신을 보라고 하면, 절대로 보지 말 것.
  6. 아무 것도 이해 못하는 이에게는 아무 말도 말 것.
  7. 아무 것도 만들어내지 말 것. 어차피 엉뚱한 해석이 붙어서, 평생 쫓아다니기 때문임.

그런데 뭐, 사라진다 한들 호기심만 더 키우게 마련이다. 밥 딜런도 결코 사라진 적이 없으며, 랭보는 뻔뻔스레 시를 훗날까지 남겼다. 괜히 흔적을 없애려 하는 것도 가오잡는 거에 불과하게 비쳐진다는 얘기다. 쓸모 없다. 그렇다면 랭보가 말하는 저 장면은 밥 딜런을 잘못 해석한 것일까?

그렇지도 않다. 어차피 밥 딜런은 아무도 아니며, 이 영화는 밥 딜런이 어떤 사람인가보다는, 사람들이 밥 딜런을 어떻게 보느냐에 대한 영화다. 어차피 밥 딜런은 창조주처럼 바라보기만 할 것이다. 제각기 해석하는 꼴이 참 재밌구나, 하면서 말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관객에게 불편한 영화가 이 영화다. 단순히 음악 영화로만 봤으면 좋을 것을. 하지만 드러내면 드러낸대로의 의미가 있겠지.

아무튼 누구나 밥 딜런이 될 수 있다. 스타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모두에 대한 모두의 투쟁. 각각 나름대로의 이미지를 모두가 갖고 있다. 하나로 설명할 수 있다 하면, 그것은 축복일까?

2008년 6월 20일 금요일

33번째 게시



사흘을 연짱 저녁 늦게까지 놀았다. 피곤한 일이다. 하루는 영화를 보았고, 하루는 회사 동기들이랑 놀았고, 하루는 **포럼 운영진 모임(?)이라고는 하는데, 사람들이 안 모여서 불발되었지만 나는 나대로 C와 만나서 놀다가 들어갔는디...

역시 별로 힘들지가 않네. ㅇ_ㅇ

노는 것은 확실히 에너지가 덜 들어간다. 그리고 놀다 보면 확실히 고통도 줄긴 준다. 그리고 본의 아니게 선물도 하나 하게 됐는데, 안나 가발다의 "누군가 어디에서 나를 기다리면 좋겠다"를 친구의 친구에게 줘버렸다. 그리 마음에 안 든 것은 아니었는데(이 여자의 장편이 어떨지 호기심은 난다), 왠지 뻔해 보여서였다. 다 읽지 않은 상태였거든. 단편집만 보면 내가 싫어하는 종류의 냄새(일본틱한 '쿨함')가 약간 난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ㅎㅎ

C는 반년만에 본 셈인데, 확실히 얘도 직장때문에 옷을 밋밋하게 입고다닌다. 늙어 뵌다 놀렸더니 자기도 이제 늙었다고 답한다. 이러면 응수를 못하잖나. 그래도 제너럴 닥터 킴에게처방을 받았으니 감기는 낫것지. 우연히 옆자리 테이블에 위재천 기자가 앉아 있었다. 괜히 반가워 하는 표정을 지으니, 나 자신도 꽤나 사교적인 인물이다.

생각해 보면 나, 겨자씨 외교관 될 수 잇것어.~

2008년 6월 15일 일요일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패배하는 것은 언제나 인간일 뿐. 운명은 언제나 승리하리니.

무슨 상관이랴. 패배하건 승리하건 나만 살아 있으면 됨시롱. 그 자체가 고통이라는 점을 뻔히 알고서도 말이다. 시대의 반영이 지나치게 커지면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처럼 될 터이고, 그냥 저냥 살다가 죽으면 평범한 행복(?)이 될 터이다. 다만 이 소설에 '종로서적'의 대목이 나와서 참 감상에 젖게 만든다.

종로서적을 매우 잘 기억한다. 고딩 때 제일 잘 가는 곳은 교보문고였지만(지금도 다르지는 않다), 사람 만날 때는 닥치고 종로서적이었다. 층층이 계단을 내려오면서 시간 때우던 기억은 작가도 동일하게 갖고 있던 모양이다. 게다가 당시 H를 만나기 위해 두 시간, 아니 세 시간이었던가? 기다렸던 기억도 난다. 삐삐를 갖고 다닌 시기였는데, 아... 아무튼 만나기는 만났구나. 롤랑 바르뜨의 사랑의 단상(혹은 좀 우아하게 쓴 베르테르의 슬픔 ㅎㅎ)에 나오는 "기다림"을 그 때처럼 뼈저리게 느낀 적도 없었지. 기다린다는 것. 지나고 나면 다 소용없는 짓이기는 하지만, 사람을 대단히 흥분되고 긴장되게 만드는 뭔가가 있기 때문이다.

여간해서는 느끼기 힘든 느낌이기도 하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기다림"이 있으니까. 하여간 그 때는 몰랐다. "목적"이라는 것이 전혀 의미가 없음을. 그저 상대방의 체온만 있으면 끝이라는 사실을. 아니, 지금도 난 그 사실을 이해 못하는지 모르겠다.

2008년 6월 13일 금요일

포기



슬램덩크의 그 KFC(!) 감독이 한 말로 기억한다. "포기해. 그러면 편해져." 포기를 모르는 불굴의 정신.따위를 혐오해 마다 않는 나의 태평함도 있고, 도무지 감각? 감정? 같은 것이 되살아나질 않는 나의 무심함도 있고, 정서적인 주파수는 물론, 외부 세상의 일에도 별반 관심이 가질 않는 일종의 장애(투입장애라고 하던가?)도 있고 하니 그냥 정서적인 편안함이나 사랑따위를 포기해 버리면 되지 싶다.

편해지잖아. ㅇ_ㅇ

그래도 3끼를 먹고는 있으니(두끼만 먹는 날도 많다), 삶에 감사해한다. 이외수 선생께서 굶으면 동물이 되더라고 한다. 맞다고는 생각하지만, 굶지 않아도 뭐 동물인 건 마찬가지일 텐데... 그냥 동물로 살아야겠다.

사람으로 살기, 다정다감한 사람으로 살기 참 피곤하다. 끝. 끄읏.

2008년 6월 4일 수요일

Death in Venice



아임낫데어에서도 밥딜런(!)이 비슷한 대사를 하는 부분이 있다. 자신에게 윤리란 없다는 것이다. 맞다. 중요한 것...정도가 아니라, "명제"는 생존이다. 살아남기(Rester vivant)만이 하나의 sollen이라 보면 될 것이다. 바로 거기서부터 고통이 시작되니까. 윤리라는 것은 인간의 발명품이지 자연의 발명품이 아니다. 그리고 최소한의 비용을 위해 윤리를 지켜주는 편이 "편하다." 그러하지 않으면 불필요한 비용이 커진다.

윤리에 대해 지극히 높은 관심을 갖고 있는 반윤리하고는 다르다. 윤리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기에 비윤리이다. 살아남기와 그에 따르는 고통, 고통의 또 다른 이름인 사랑.정도에만 관심을 갖고 있다면 될까. 사실 '관심'이라는 것도 별반 관심이 없다. 모든 것에, 무감각해졌다. 무디어졌다. 그냥 일이나 하는 편이 마음이 편하다. 소원이 하나라도 있다면, 저 아센바흐 영감처럼, 빛. 찬란한 빛을 느껴보고 죽는 것. 그게 뭔지는 나도 모르겠다. 아니, 그러고보면 소원도 아니다. 갑자기 생각나서 지껄였을 뿐.

사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갑자기 살아가다보니...로 점철되어 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2008년 6월 3일 화요일

Death in Venice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영화판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인 동시에, 지식에 대한 경멸. 아니, 이성에 대한 힐난이라 봐도 좋을 텐데, 루키아노 비스콘티의 이 영화나, 토마스 만의 책이나 왠지 모르게 둘 다 걸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약간씩 다른 구성(가령 영화의 아센바흐는 작곡가이지만 책의 아센바흐는 작가이며, 영화에 나오는 알프레드는 책에 없다)이 있긴 하지만, 그건 영화는 영화대로, 책은 책대로의 의미를 갖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영화이건 책이건, 무대는 베네치아이다. 삼도천(三途川)이 흐르는, 베네치아이다.

사실 아센바흐의 미소년에 대한 사랑이라고 봐도 좋을 이 영화 내용만 보자면, 정말 내용이 없다. 그저 따라다니면서 힐끔 힐끔 쳐다보다가 시로코(제타건담의 팬이라면 이 단어를 잊을 수 없다)가 옮겨다 놓은 콜레라에 걸려 죽는 내용일 뿐이다. 뭐, 감히 사랑을 하였기 때문에 죽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엄밀히 말해서 아센바흐는, 도리를 저버렸다. 아름다움을 갈망하였으니.

그런데 과연 이런 사랑을 한다면, 아니, 설사 그 미소년이 소년이 아니라 소녀라 할지라도, 그것은 "용납"이 될 수 있는 성질일까? 나야 비윤리적인 사람이니 (비윤리는 반윤리와는 다르다) 어쩌겠수~뿐이지만 다수의견은 그러하지 않을 것이다. 윤리라는 것은, 다시 말해서 다수 의견이라는 것은 나름대로의 논리와 의의를 갖고 있다. 단순히 아름답다고 하여 실제로 그런 사랑을 할 수 없음 또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뻔히들 아실 것이다.) 작품에서나 그런 것이 인정을 받는다. 내가 정작 흥미를 느끼는 것은, 실제로 아센바흐 되기가 얼마나 가능할까이다.

물론 영화 이상으로 나아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센바흐 되기는 커녕, 과연 이것이 사랑일까 헷갈려 하다가 끝내기도 쉬운, 짧은 인생(Das Leben ist zu kurz!)이다. 결국 얼마나 '다수의견'에 얽매이느냐.가 요점이 되시겠다. 당연히 의견이고 자시고 간에 생각 없이, 윤리 없이 달려드는 것이 사랑이건만은.